서양 디자인사
역사주의와 원기능주의
응용미술의 시대
디자인의 역사는 응용미술(Applied Art) 시대로부터 시작된다. 응용미술 시대였던 19세기 서구를 지배했던 경향을 역사주의(Historicism)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역사주의와는 전혀 성격을 달리 하는 경향도 나타났는데, 그것이 원기능주의(Proto-Functionalism)이다. 19세기를 응용미술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일단 역사주의를 기준으로 삼는 관점이다. 역사주의에 반해 원기능주의의 디자인사적 위치는 다소 불안정하기는 하나, 그 역시 19세기 디자인의 진실된 한 측면을 보여주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원기능주의란 말 그대로 20세기 기능주의의 원조격이 되는 19세기적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19세기에는 응용미술만이 존재했었다는 식의 단언은 엄밀히 말하면 사실과 다른 것이 되지만, 그러한 양식이 보다 지배적이고 의식적이었다는 점에서는 상대적으로 정당하다. 이처럼 완전히 대립하는 양식이 함께 존재했다는 것은 19세기가 디자인사의 여명기로서 그만큼 혼란스러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어느 시대나 자세히
살펴보면 전혀 대립되는 양식들이 공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회화의 경우 인상주의의 시대에 전통적인
아카데미즘이 공존했으며(아니 오히려 당시에는 아카데미즘이 주류를 이루었다), 포스트모던 양식의 건축이 늘어만 가는 오늘날에도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축이 세워지는 예를 흔히 볼 수 있다. 한 시대에 하나의 양식만이 존재했었다고 믿는 것처럼 우매한 태도도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흔히 고전주의-낭만주의-사실주의-인상주의-입체주의
등으로 이어지는 근대미술의 양식적 발전 경로는 허구일 수 있다. 그러나 한 시대에 단 하나의 양식만이
존재했었다고 지나치게 단순화하지만 않는다면, 비교적 지배적인 하나의 양식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이리라.
양식의 대립
19세기에 그처럼 날카롭게 대립되는 두 양식이 공존했었다는 사실은 역시
디자인사에서 당시가 그만큼 과도기였고 혼란스러웠다는 것은 반증하는 것으로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먼저
역사주의는 말 그대로 이전의 역사적 양식 또는 그 모티브들을 당시의 건축이나 생산품에 응용한 양식이었다. 그것은
과거의 양식들 및 모티브들을 그대로, 또는 변형하여 차용하거나 모방하였기 때문에 복고주의(Revivalism)라고도 부르며, 서로 다른 시대와 양식들을 당시의
관심에 따라 마구 혼합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절충주의(Ecclecticism)라고도 부른다. 여기에는 서구의 고대문화인 그리스와 로마의 양식, 그리고 중세의
고딕양식은 말할 것도 없고, 동방 이슬람의 양식들조차 거침없이 차용되었기 때문에, 역사주의적 양식들 중에는 네오 고딕(Neo-Gothic)이니 네오
바로크(Neo-Baroque)니 네오 레반트(Neo-Levant)니
하는 이름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풍미하였다.
그에 반해 원기능주의 양식은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재료, 그리고 새로운
기능에 의해 필연적으로 생겨난 것으로서, 이제까지의 건축이나 디자인의 생산방식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원기능주의는 19세기
서구의 산업사회를 기술적으로 가장 잘 반영한 양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역사주의와 원기능주의의
극단적인 대립은 보다 근본적으로 볼 때, 당시 서구 문화의 분열상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당시 서구는 경제적으로는 이미 산업혁명에 의해 근대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갖추고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시민혁명과 해외 식민지 개척에 의해 부르주아 제국주의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나 문화나 관습의 면에서 볼 때, 이미 확고해진 경제적, 정치적 지배력과 평형을 이룰 만큼의 독자적인 수준에 도달해 있지는 못했다. 따라서
근대적인 생산기술 시스템은 철재와 유리, 증기기관, 공학기술자들을
산출하여 이전의 어느 시대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건축 형태와 공법, 그리고 생산품을 물질적으로
가능케 한 반면, 그러한 사회의 지배계급으로서의 자본가들은 풍족한 생활 속에서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표출할 적절한 방식을 몹시 갈망하고 있던 터였다.
18-19세기에 걸친 시민혁명을 통해 이전의 귀족계급을 타도하고 새로운 사회의
지배자가 된 자본가계급은 아직 자신들의 영화를 드러낼 세련되고 고급한 문화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우선은
손쉽게 과거 귀족계급들의 양식을 모방하는 데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러한 과정에서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건축양식을 흉내내기도 하고, 아니면 동방의 이국취미에 몰두하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19세기 산업사회는 한편으로는 근대적 기술에 바탕한 원기능주의
양식을 불가피하게 발전시키면서도, 의도적 측면에서는 전혀 모순되는 역사주의에 빠져들어갔던 것이다. 이는 마치 평생 돈버는 일밖에는 모르던 성공한 기업체의 사장이, 자기
집에서는 전통적인 서화나 골동품을 늘어놓고 시조를 읊조리면서 전통적인 양반문화를 흉내내는 경우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19세기 서구 산업사회의 모순을 가장 보여준 시기가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1837-1901)이다. 영국 역사상 최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빅토리아 시대의 자본가들은 걱정이라고는 모르며 자신감에 차 있었지만, 그 대신에 취미의 수준은 아주 모호한 것이었고 기본적으로 속물근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이 선호했던 건축물과 생활용품들은 시대착오적인 고대양식에 뒤덮인 역사주의의 극단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을 밑받침했던 것은 날로 발전해간 근대산업이었기 때문에, 그로부터
원기능주의 양식 역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만국박람회의 풍경
양식상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계기가 된 사건이 바로 1851년 런던에서 개최된 제1회
만국박람회(The Great Exhibition)이다. 이는
오늘날 국제박람회(International Exposition)의 선구격이 되는 행사였는데, 당시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리우며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영국이 자국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마련한 세계 최초의
국제박람회였던 것이다. 이 박람회에는 개최국인 영국을 비롯하여 유럽 각국 및 미국의 각종 산업생산물과
예술작품 등이 전시되어 서로의 국위를 다투었다. 그런데 이 박람회는 디자인의 역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것은 말한 바처럼 이 박람회를 계기로 근대적인 산업생산품의 양식에 대한 문제가 날카롭게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이 박람회에서 디자인과
관련하여 관심을 끈 대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바로 박람회 전시관으로 세워진 수정궁(Crystal Palace, 1851)이라는 건축물이었다. 이 건축물은
전통적인 건축가가 아니라 공학기술자였던 조셉 팩스턴(Joseph Paxton)에 의해 설계되었다. 이 전시관은 근대적 재료인 철과 유리만으로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조립식 건축물로서, 그때까지 건축물이라고 하면 당연히 석재로 지어야 하는 것으로 믿고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 건축물에 대해 즉각 찬반양론이 펼쳐졌지만, 이제 이 건축물이
근대건축사에서 하나의 획기적인 기념비로 남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19세기 동안 이 건축물에
필적할 만큼 중요한 것으로는 역시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기념물로 세워진 에펠탑을 들 수 있을
뿐이다. 에펠탑 역시 공학기술자였던 귀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의 작품으로서 당시 공학기술의 금자탑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박람회에 출품된 영국 제품들의 디자인 수준이었다. 박람회가 개최되자 영국의 각
언론과 지식인들은 즉각적으로 비판을 제기했다. 그것은 비록 영국 제품들이 제조기술 및 품질에서는 우수할지
몰라도, 그것의 디자인, 즉 양식에 있어서는 어떠한 통일성도
갖추지 못하고 혼란스러움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박람회를 계기로 영국은 오히려 자국 제품의 디자인
수준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 뒤떨어짐을 스스로 드러낸 꼴이 되어버렸다.
당시 영국 제품의 디자인에
어떤 확고한 표준도 없음을 문제시하여 이에 가장 먼저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은 다름 아닌 헨리 콜(Henry
Cole)이라는 관리였다. 그는 박람회 이전부터 연례적인 디자인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산업생산품의
예술적 질의 향상을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아직 디자인이라는 말이 생겨나기 이전이었으므로, 헨리 콜은 미술제조(Art & Manufacture)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내고, 이를 기계제품에 응용된 미술 또는 아름다움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헨리 콜의 사고에서 우리는 19세기적인 응용미술 개념의 아주
모범적인 사례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디자인을 국제간의 무역경쟁에서의 한 중요한 수단으로 생각했다는
점에서는 오늘날의 국가적 차원의 디자인 진흥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으나, 다만 디자인을 미술
또는 미학적 원리를 생산품에 단순히 부가 내지는 적용한다는, 결국 장식적인 행위 이상으로 생각하지 못한
데 시대적인 한계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디자인을 근대적인 기계생산품과 미술의 단순한 결합으로 생각하는
데서 벗어나, 제품 생산의 계획 또는 과정 그 자체에 내재하는 특성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20세기의 모던 디자인 개념이 성립되기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이처럼 19세기 서구의 디자인은 역사주의와 원기능주의라고 하는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양식을 함께 산출하였지만, 이후 20세기에 들어와 기능주의가 근대적 요구에 적합한 양식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됨에 따라, 기능주의의 선구자로서의 원기능주의가 역사주의를 대신하여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대체로 19세기를 역사주의가
우세했던 응용미술의 시대로 보는 것은 20세기의 기능주의와 시대적 성격을 보다 뚜렷하게 하기 위한 역사가들의
구분법에 크게 좌우된 점이 없지 않을 것이다.
윌리엄 모리스와 미술공예운동
디자인 사상의 출현
아마도 윌리엄 모리스는
디자인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일 것이다. 그는 디자인의 이념적 기반을 마련한 사람이자 가장 뚜렷한
개성을 지닌 디자인 사상가로 간주되고 있다. 확실히 모리스는 최초의 디자인 사상가이자 운동가라고 할
수 있으며, 또 그의 영향 하에 추진된 ‘미술공예운동(The Arts and Crafts Movement)’은 최초의 디자인운동이기도 하다. 또한 모리스는 강한 신념과 정열의 소유자로서 자신이 살던 시대의 문화와 예술 상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모던 디자인을 위한 이념적 정당성과 기초를 부여하였지만, 그의
이념과 실천에는 많은 모순과 한계가 내포되어 있음도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리스 역시 시대적 한계
내에서 사고하고 행동한 한 사람의 비판적 지식인이자 예술가로 이해하여야 하며, 그에게서 나타나는 이념과
실천의 모순과 한계를 분별있게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96)는 19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공예가이고 사회사상가이다. 그는 토마스 칼라일, 존 러스킨과 더불어 빅토리아시대의 대표적인 사상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그의 선배 사상가들, 특히 그중에서도 러스킨의 신념에 커다란 영향을 받고, 당시 영국의 사회현실과 예술의 상태에 대해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이념을 실천하는 데에도
열심이었다. 그리고 미술공예운동은 바로 예술을 사회문제와 연결시킨 윌리엄 모리스라는 한 인물을 기점으로
그를 따르는 일군의 예술가들에 의해 추진된 운동이었다. 따라서 윌리엄 모리스는 최초의 디자인 사상가로서, 그리고 미술공예운동은 최초의 디자인 운동으로서 세기를 넘어서까지 이후의 디자인 이념과 운동에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의 기준이 되었고, 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윌리엄 모리스가 살았던 19세기 영국(빅토리아 시대)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산업혁명을 경험한 나라로서, 온갖 사회적 문제와 모순이 중첩되어 있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의 선두국가답게 역사상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고, 또
당시의 지배계급인 자본가들 역시 부와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의 불평등이라든지
산업화에 따른 제품의 질의 저하, 그리고 도시화에 따른 생활환경의 피폐 등이 사회적 문제로 드러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그러한 현실에서 문화적 위기감을 느끼고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한 현실에 대한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반응은 대체로 다음 몇 가지 방식으로 나타났다. 즉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사회주의자가 되거나, 아니면 산업화를 거부하고
전통주의자로 돌아서거나, 또는 추악한 현실로부터 등을 돌린 채 예술의 세계로 몰입하거나 하는 경향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윌리엄 모리스는 이러한
당시의 지식인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사상가로서의 모리스는 사회주의자요, 전통주의자였지만, 예술적 입장에서는 오히려 당시 예술가들의 유미주의적
태도를 통렬히 비판하고 예술의 사회적 책임과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회사상과 예술관의 결합으로
인하여 모리스는 당대의 어느 누구와도 뚜렷하게 구별되는 독특한 면모를 보여줄 수 있었다.
윌리엄 모리스의 예술관
모리스는 그의 스승인 러스킨과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예술적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에서부터 자신의 실천적 과업을 세워나갔다. 모리스는 르네상스
이후 수 세기 동안, 특히 산업혁명 이후 수 십 년 동안 예술가의 사회적 기반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쇠퇴하였는지를
인식한 최초의 예술가였다(최초의 사상가는 존 러스킨이다)라고
니콜라우스 펩스너(Nikolaus Pevsner)는 평가한다. 자신의
시대의 예술적 상황에 대한 모리스의 비판은 다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기계생산에 의한
수공예 전통의 단절과 속악한 대중의 취미였으며,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회적 현실에
등을 돌리고 있는 예술가들의 유미주의적 태도였다. 이러한 당시의 예술적 상황과는 반대로 모리스의 예술에
대한 견해에는 노동이 중심을 차지한다. 그에게 있어서 예술이란 인간이 노동하는 가운데에서 느끼는 기쁨의
표현이다. 따라서 예술은 예술가의 재능이나 예술적으로 완성된 대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과정
속에 있는 경험인 것이다.
또 이러한 모리스의 예술관에서
핵심적인 것이 노동의 유기적 성격이며, 이러한 노동의 형태는 중세적인 것이다. 그의 중세주의는 근본적으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모리스가 남긴 중요한 이념의 하나는 바로 '예술의 민주화'이다.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은 이러한 사상을 가장 소박하면서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나는 소수를 위한 교육이나 소수를 위한 자유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소수를 위한 예술도 더더욱 원치
않는다." 이러한 모리스의 예술관은 자연히 순수미술보다는 공예나 디자인과 같은 응용미술에로
그의 관심을 향하게 했다. 이러한 모리스의 태도가 갖는 의의를 니콜라우스 펩스너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모리스는 진정한 예언자였다. 평범한
인간의 주거가 다시 한 번 건축가의 사고에서 가치 있는 주제가 되고, 의자, 벽지, 화병 등이 예술가의 창조력을 위한 가치 있는 대상이 된 것은
모리스의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계생산을 부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리스는 오늘날 디자인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유형의 조형적 실천의 선구자가 된 것이다. 즉 “그것은 그가 아카데믹한 예술 속에서 (생활과 유리된)예술의 종말을 보았기 때문이며 일상적, 정신적 생활을 지지하는 물건-즉 도구나 건축에서부터 인쇄물, 벽지에 이르기까지-에서 예술 본연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리스의 예술의 민주화 이념이 바로 예술의 생활화와 연결되어 있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말했다시피 윌리엄 모리스는
실천하는 지식인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이념을 직접 실천해보이기 위해 그의 동료들과 함께 1861년 런던에 '모리스, 마샬 & 포크너 상회'를 설립하였다. 펩스너가 서양미술사에서 신기원을 이루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높이 평가한 이 활동을 통해 모리스는 각종 생활용품들을
가히 예술품의 수준으로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수공업적인 생산방식에 의해 정성들여 만든 제품의
가격은 일반 대중이 구입하기에는 턱없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모리스의 예술적인 수공예품이, 비록 품질은 조악할지라도 기계로 대량생산한 제품과 가격면에서 이미 경쟁이 될 수 없었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중세적 생산방식과 전통을 지켜나가려던
모리스의 신념은 여기에서 이내 벽에 부닥치지 않을 수 없었다.
윌리엄 모리스의 모순과 영향
아놀드 하우저는 윌리엄
모리스의 모순이 복고주의, 엘리트주의, 그리고 기계의 부정, 이 세 가지에 있다고 정확히 지적한다. 즉 사회적 현실과 사회생활
속에서의 예술의 기능을 제대로 파악하면서도 그는 중세와 중세적 미의 이상을 낭만적으로 사랑한다. 민중에
의해서, 민중을 위하여 창조된 예술의 필요성을 설교하지만, 그러나
자신은 한결같이 부자에게만 허용되고 교양인만이 즐길 수 있는 물건들을 생산하는 하나의 쾌락적 딜레탕트(예술애호가)인 것이다. 그는 예술이 노동에서,
실제적인 기능에서 나온다고 지적하나, 가장 중요하고 실제적인 현대적 생산수단, 즉 기계의 의미를 잘못 인식한다. 그의 학설과 예술적 실천 사이에
가로놓인 여러 모순들의 원천은 소시민적인 전통주의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러한 소시민적 전통주의의 시대착오적
편협성에서 모리스 자신도 결코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미술공예운동은 모리스
자신을 포함하여 그의 가르침에 감화를 받은 젊은 미술가, 건축가, 애호가들에
의해 19세기 후반기 동안 유지되어나갔다. 그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월터 크레인, 찰스 애쉬비를 꼽을 수 있다. 한편
미술공예운동은 일단의 집단적 활동을 통해 실천되고 확산되어갔다. 예컨대 1882년에 아서 맥머도가 설립한 센추리 길드(Century Guild),
1884년의 예술노동자 길드(Art Workers' Guild), 같은 해의 가정예술산업협회(Home Arts Industries Association), 1888년에 애쉬비가 설립한 수공예 길드와 학교(Guild & School of Handicraft), 그리고 같은 해의 미술공예전시협회(The Arts & Crafts Exhibition Society) 등이 뒤를 이었다.
물론 윌리엄 모리스의 이념과
미술공예운동은 영국을 벗어나 유럽대륙과 미국에까지 전파되었으며, 세기말의 아르누보 양식의 태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무튼 몇 가지의 중대한 모순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윌리엄 모리스가 디자인의 역사에
끼친 진정한 영향력은, 그의 이름이 디자인의 본성과 사회적 책임을 생각하는 후대의 디자이너들에게 언제나
잊혀지지 않고 빛을 비춰주는 등불이 되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세기말의 양식, 아르누보
전환기의 장식미술
정치, 경제, 과학기술, 예술상에서
커다란 변혁을 가져온 서구의 19세기가 마지막으로 남긴 미술양식은 아르누보(Art Nouveau)였다. 그런 점에서 아르누보는 바로 세기말(Fin de Siècle)을 연상시키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르누보의
전성기는 1890년대부터 1차대전이 일어나는 1914년까지로, 세기말 양식이라기보다는 세기 전환기의 양식이라고
불러야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르누보의 양식적 특성은 근본적으로 19세기적인 장식미술에 훨씬 가까운 것으로서, 20세기의 모던 디자인과는
세기의 전환만큼이나 뚜렷하게 구별된다.
이는 달리 말하면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있다는 점에서 아르누보는 야누스적인 성격을
갖기도 하지만, 그 방향성은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보다는 이제 막 사라져가는 시대를 향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아르누보를 세기말 양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하다(문화사적인 의미에서 ‘세기말’은
19세기 말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아르누보를
19세기 장식미술의 완결판으로 간주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20세기 모던 디자인으로 나아가는 일련의 계기들이 들어 있음도 사실이다. 이는
아르누보의 양식적 기원을 살피는 과정에서 드러날 것이다.
아르누보의 양식적 특성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아르누보의 이미지들을 몇 가지 나열해보자. 오브리 비어즐리(Aubrey
Beardsley)의 가늘고 관능적인 선묘의 일러스트레이션, 율동적이면서도 볼륨감 있는
반 데 벨데(Henri van de Velde)의 디자인, 화려하고
사치스런 파리 지하철역의 입구, 우아하고 매력적인 알퐁스 뮈샤(Alphonse
Mucha) 포스터의 여인상들, 친근한 자연 정경을 꿈속에 새겨 넣은 에밀 갈레(Emile Gallé)의 유리그릇들. 아르누보는 한 마디로 우아하고
사치스럽고 장식적이며 자연적이다.
그런 점에서 아르누보는
이전의 바로크나 로코코 같은 장식과잉 양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아르누보를 그런 양식들과 구분해주는
것은 보다 단순한 선과 구도, 현대적인 소재와 감각의 활용이다. 그리고
아르누보하면 흔히 곡선적인 양식으로만 알고 있는데, 이와 정반대되는 직선적인 경향도 무시할 수는 없다. 곡선형이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보다
단순하고 절제된 직선형이 발전했는데, 이는 기능주의에 보다 가까이 다가간 것으로서, 20세기 모던 디자인의 교량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아르누보의 양식적 기원은
매우 다양하다. 앞에서 약간 예를 들었지만, 흔히 아르누보의
양식적 특성으로 자연적인 모티브(주로 식물)의 선호, 곡선적인 윤곽, 평면성, 이국취미, 장식주의 등을 드는데, 이러한 것들의 혼합물인 아르누보는 그 자양분을
여러 군데에서 가져왔음이 분명하다. 서구의 19세기가 문화적으로
전환기였고, 또 지나간 시대나 외래의 문화를 왕성하게 섭취한 시기였던 만큼, 바로 이러한 시대의 마지막에 자리한 아르누보는 나름대로 그들을 종합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아르누보에 영향을 미친 요소들은 매우 다양해서 동시대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 그리고 이국적인 것으로 각기 구별된다.
먼저 동시대적인 영향으로는
영국의 미술공예운동, 문학에서의 상징주의, 그리고 당시의
기술공학을 들 수 있다. 미술공예운동은 순수미술보다 공예와 같은 응용미술에의 관심을 높임과 더불어, 한 작가가 특정한 장르에만 한정하지 않고 여러 장르에 걸친 통합적 작업을 하도록 고무했다. 한편 프랑스의 상징주의는 아르누보에 신비하고도 환상적인 요소들을 제공하였는데,
아르누보의 특성 중에 하나는 바로 이전 예술에서의 설명적인 것을 상징적인 것으로 대체했다는 점이다.
한편 당시의 공학기술은 새로운 재료와 기술을 아르누보에 제공하였다. 특히 철(鐵)은 아르누보 작가들이 가장 즐겨 사용한 재료였는데, 아르누보 작가들은 철이 어떻게 무기나 기계에서만이 아니라 훌륭한 예술의 소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최초의
예술가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우리 신라시대의 공예가들의 금을 다루는 솜씨가 신기에 가까웠다고
한다면, 아르누보의 작가들은 철을 엿 주무르듯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외에도 역사적인 요소로는 18세기 프랑스 로코코 미술의 화려한 감각과 고대 켈트족의 복잡한
패턴이 영감을 주었으며, 이국적인 것으로는 일본 미술의 영향이 주목할 만하다. 특히 일본 목판화에서 볼 수 있는 평면적인 화면 구성과 풍부한 패턴은 아르누보 예술가들에게 강렬한 충격을 주었는데, 그들은 이 같은 구성적인 측면을 양식상 평면적인 선의 율동감과 대담한 색채 대비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다양한 양식적 원천들이
흘러들어와 새로운 예술, 아르누보를 형성하였다(아르누보라는
말은 불어로 ‘새로운 예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아르누보는
그러한 요소들을 종합한, 이른바 19세기 장식미술의 완결판이었으므로, 프랑스 뿐 아니라 당시 유럽 전역에 걸쳐 대단히 환영받는 예술이 되었다. 따라서
유럽 각국에서 아르누보의 발전은 제각기 다른 양상을 보였다. 원래 아르누보의 기원은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이었지만, 아르누보를 완성된 양식으로 발전시킨 곳은 프랑스와 벨기에였다. 아르누보는
그 광범위한 유행만큼이나 다양한 이름들을 가지고 있기도 했는데, 독일에서는 유겐트슈틸(Jugendstil), 오스트리아에서는 제체시온(Sezession),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는 스틸레 리버티(Stile Liberty)라고 불리었다.
앞에서 언급한 아르누보의
두 갈래 양식, 즉 곡선형과 직선형은 유럽 각국에서의 양식적 발전을 일정하게 묶어서 살피는 데 도움을
준다. 우아하면서도 휘늘어진 느낌의 곡선형 아르누보는 역시 그 중심국이었던 프랑스와 벨기에를 중심으로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이에 반해 직선형 아르누보는 원래 스코틀랜드로부터 유래하는데, 수직형의 높다란 등받이를 가진 의자 디자인으로 유명한 찰스 매킨토시(Charles
McIntosh)에게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아르누보는
이전의 바로크나 로코코 같은 장식과잉 양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아르누보를 그런 양식들과 구분해주는
것은 보다 단순한 선과 구도, 현대적인 소재와 감각의 활용이다. 그리고
아르누보하면 흔히 곡선적인 양식으로만 알고 있는데, 이와 정반대되는 직선적인 경향도 무시할 수는 없다. 곡선형이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보다
단순하고 절제된 직선형이 발전했는데, 이는 기능주의에 보다 가까이 다가간 것으로서, 20세기 모던 디자인의 교량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아르누보의 양식적 기원은
매우 다양하다. 앞에서 약간 예를 들었지만, 흔히 아르누보의
양식적 특성으로 자연적인 모티브(주로 식물)의 선호, 곡선적인 윤곽, 평면성, 이국취미, 장식주의 등을 드는데, 이러한 것들의 혼합물인 아르누보는 그 자양분을
여러 군데에서 가져왔음이 분명하다. 서구의 19세기가 문화적으로
전환기였고, 또 지나간 시대나 외래의 문화를 왕성하게 섭취한 시기였던 만큼, 바로 이러한 시대의 마지막에 자리한 아르누보는 나름대로 그들을 종합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아르누보에 영향을 미친 요소들은 매우 다양해서 동시대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 그리고 이국적인 것으로 각기 구별된다.
먼저 동시대적인 영향으로는
영국의 미술공예운동, 문학에서의 상징주의, 그리고 당시의
기술공학을 들 수 있다. 미술공예운동은 순수미술보다 공예와 같은 응용미술에의 관심을 높임과 더불어, 한 작가가 특정한 장르에만 한정하지 않고 여러 장르에 걸친 통합적 작업을 하도록 고무했다. 한편 프랑스의 상징주의는 아르누보에 신비하고도 환상적인 요소들을 제공하였는데,
아르누보의 특성 중에 하나는 바로 이전 예술에서의 설명적인 것을 상징적인 것으로 대체했다는 점이다.
한편 당시의 공학기술은 새로운 재료와 기술을 아르누보에 제공하였다. 특히 철(鐵)은 아르누보 작가들이 가장 즐겨 사용한 재료였는데, 아르누보 작가들은 철이 어떻게 무기나 기계에서만이 아니라 훌륭한 예술의 소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최초의
예술가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우리 신라시대의 공예가들의 금을 다루는 솜씨가 신기에 가까웠다고
한다면, 아르누보의 작가들은 철을 엿 주무르듯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외에도 역사적인 요소로는 18세기 프랑스 로코코 미술의 화려한 감각과 고대 켈트족의 복잡한 패턴이 영감을 주었으며, 이국적인 것으로는 일본 미술의 영향이 주목할 만하다. 특히 일본
목판화에서 볼 수 있는 평면적인 화면 구성과 풍부한 패턴은 아르누보 예술가들에게 강렬한 충격을 주었는데, 그들은
이 같은 구성적인 측면을 양식상 평면적인 선의 율동감과 대담한 색채 대비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다양한 양식적 원천들이
흘러들어와 새로운 예술, 아르누보를 형성하였다(아르누보라는
말은 불어로 ‘새로운 예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아르누보는
그러한 요소들을 종합한, 이른바 19세기 장식미술의 완결판이었으므로, 프랑스 뿐 아니라 당시 유럽 전역에 걸쳐 대단히 환영받는 예술이 되었다. 따라서
유럽 각국에서 아르누보의 발전은 제각기 다른 양상을 보였다. 원래 아르누보의 기원은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이었지만, 아르누보를 완성된 양식으로 발전시킨 곳은 프랑스와 벨기에였다. 아르누보는
그 광범위한 유행만큼이나 다양한 이름들을 가지고 있기도 했는데, 독일에서는 유겐트슈틸(Jugendstil), 오스트리아에서는 제체시온(Sezession),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는 스틸레 리버티(Stile Liberty)라고 불리었다.
앞에서 언급한 아르누보의
두 갈래 양식, 즉 곡선형과 직선형은 유럽 각국에서의 양식적 발전을 일정하게 묶어서 살피는 데 도움을
준다. 우아하면서도 휘늘어진 느낌의 곡선형 아르누보는 역시 그 중심국이었던 프랑스와 벨기에를 중심으로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이에 반해 직선형 아르누보는 원래 스코틀랜드로부터 유래하는데, 수직형의 높다란 등받이를 가진 의자 디자인으로 유명한 찰스 매킨토시(Charles
McIntosh)에게서 가장 잘 드러난다.
기계미학과 모던 디자인의 선구자들
20세기의 양식
모던 디자인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비로소 그 모습을 나타낸다. 19세기적인 장식미술은
세기전환기의 아르누보를 마지막으로 디자인사의 무대에서 일단 그 주역을 마감한다. 물론 자동차의 시대에도
마차나 달구지가 있듯이, 장식미술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다. 다만
이후 장식미술은 원숭이가 인류의 조상이면서도 현재 나란히 생존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디자인의 한
종으로서 얌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따금씩 장식미술은 복고주의적 흐름을 타고 디자인사의 표면으로
잠시 얼굴을 내밀 때도 있다. 모던 디자인은 적어도 20세기의
절반 이상(초중반에 걸친, 서구를 기준으로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이
대두하기 시작하는 1960년대 무렵까지)을 지배한 20세기의 대표적인 양식으로서, 그 때문에 근대양식(Modern Style)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비록 19세기에서 20세기로의 전환이 장식미술과 모던 디자인으로 디자인의
역사 방향을 뚜렷이 구분지우기는 하지만, 역사는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달리 나름대로의 연속성과 내적
연관을 지니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20세기 모던 디자인의
역사적 조건들은 당연히 그 전 세기인 19세기에 마련된 것이고, 또
그래야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아르누보 양식 안에 이미 근대양식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보다도, 더 결정적인 하나의 영향력이 존재한다. 그것은 19세기 이후, 보다 넓게는 산업혁명 이후 서구 근대가 만들어낸 하나의
미학적 신념으로서의 기계미학(Machine Aesthetic)이다. 기계에
대한 예찬과 강력한 믿음에 근거한 기계미학은 모던 디자인의 등장을 예고하는 장중한 서곡이었다.
기계미학의 수사학
18-19세기
초반의 시기 동안 서구 시민계급의 일차적인 과제는 봉건 귀족계급과의 정치적 투쟁이었다. 그러나 일단
자신들의 승리가 확실해지고 어느 정도 안정되어지자, 시민계급은 그들의 산업과 문화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하고
찬미코자 하였다. 근대 시민계급의 지배를 가능케 한 원동력은 근대산업이었으며, 그것은 또 기계에 힘입은 바 컸다. 그들에게 기계는 마치 고대 그리스
귀족계급에게서의 올림푸스의 신들이나 호메로스의 영웅들과 같았고, 중세 신정계급에게서의 여호와와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시민계급 역시 자신들의 권력의 바탕을 노래하고 예술로서 찬미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신(기계)만을
위한 송가와 예술을 만들어내는 것은 거의 20세기에 가까이 와서야 가능했다. 20세기 초에 들어서서 수많은 시인과 예술가들이 기계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거기에 헌사를 바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이른바 기계미학의 시대가 열렸다. 다음의
몇몇 발언에서 우리는 당시 서구인들의 기계미학에 대한 확신에 찬 신념을 잘 엿볼 수 있다.
“모든 기계는 전혀 장식이 되지 않아도 아름답다. 기계를 장식하려고 애쓰지
말라. 우리는 모든 훌륭한 기계류가 우아하며, 또한 힘의
선과 미의 선이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오스카 와일드,
1881)
“불을 토해내고 있는 뱀과 같이 배기관이 드리워진 엔진 덮개를 가지고 있는 경주용 자동차-기관총과 같이 우르르 소리를 내는 경주용 자동차는 사모트라케섬의 승리의 여신상보다도 아름답다”(미래파선언, 1909)
“나는 햇빛 속에 입을 벌리고 있는 75밀리 포의 포신 뒤쪽 끝, 백색 금속 위에 번쩍이는 빛의 마술에 기막힌 매혹을 느꼈다.”(페르낭
레제, 1914)
이처럼 기계미학은 기계가
갖는 힘 자체를 하나의 독자적인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로서, 20세기 초 서구예술 전반에 걸쳐
다양한 모습으로 반영되었다. 예컨대 시와 미술에서 기계는 역동성, 구조역학, 속도, 남성적 힘, 사회주의
등 근대문명의 상징과 이미지로서 이해되는데, 입체파, 미래파, 데스틸, 구성주의 등의 사조가 그에 관련된다. 한편 건축과 디자인에서는 대상의 완벽한 구조의 진실성과 아름다움을 보장하는 것으로서 “공학자가 오늘날의 진정한 건축가이다”라는 반 데 벨데의 주장은 이러한 태도를 잘 보여주는 경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이 기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념 중의 하나인 파괴력이라든가 비인간적인 낯선 힘에 대해서
당시 서구인들은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서구인들은 기계가 가지는 두 얼굴
중에서도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측면에만 열중하였던 것이며, 기계의 또 다른 성격에 대해서 절실히 깨닫기
위해서는 1차 세계대전을 기다려야 했다.
기능주의의 대두
아무튼 20세기로 들어오면서 이전의 수공예와 장식미학은 모던 디자인과 기계미학으로 대체되었다. 또 기계미학은 모던 디자인의 태동에 직접적인 정당성을 제공한 신념체계로서, 이후
기능주의 이론으로 보다 구체화된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모던 디자인 운동의 역사는 영국의
미술사가인 니콜라우스 펩스너의 저서 <모던 디자인의 선구자들(Pioneers
of Modern Design)>(1936)을 통해 확립된 것이다. 이 책에서 펩스너는
다섯 사람의 건축가를 최초의 선구자들로 간주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고, 아돌프 로스(Adolf Loos)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경력을 세기말의 아르누보 양식에서부터 발전시킨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오스트리아의 오토 바그너(Otto Wagner)와 아돌프 로스, 미국의
루이스 설리번(Louis Sullivan)과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Lloyd
Wrignt), 그리고 벨기에의 앙리 반 데 벨데이다.
오토 바그너는 빈 분리파의
중심인물이었으며, 아돌프 로스는 아르누보의 장식주의를 격렬히 비판한 반장식론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한편 미국 기능주의의 두 선구자인 루이스 설리번과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사제지간으로서 각기 유기적 장식론과
유기적 기능주의를 주창하였다. 한편 앙리 반 데 벨데는 아르누보의 대표적인 작가의 한 사람이면서도 기계미학을
옹호하여 모던 디자인의 기능주의 방향으로 나아간, 세기전환기의 디자인 이론과 실천에서 빠트릴 수 없는
인물이다. 기계미학과 모던 디자인의 싹은 이들 선구자들에 의해 유럽대륙과 미국 각지로 전파되어나갔다.
독일공작연맹의 결성
한편 세기전환기의 다양한
시도들은 1907년 독일에서 일단 하나의 결집체를 만들어내게 된다. 그것은
바로 독일공작연맹(Deutsche Werkbund; DWB)의 결성이다. 독일공작연맹은 역시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에 크게 영향을 받았던 독일의 관리 헤르만 무테지우스(Hermann Muthesius)의 노력에 의해 제조업자, 미술가, 이론가 들을 중심으로 뮌헨에서 창립되었다. 독일공작연맹은 1908년 제1회 총회에서 기계를 긍정하는 사상을 선언하고, 양질생산이라는 목표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독일공작연맹은 이내 자신의
진로에서 하나의 기로에 서게 되는데, 그것은 디자인에서의 표준화(Standardization)와
개인주의(Individualism) 간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1914년 쾰른회의에서 독일공작연맹의 방향 설정으로 무테지우스는 표준화를 내세웠고, 반
데 벨데는 이와 대립되는 개인주의를 주장하였다. 즉 무테지우스는 대량생산을 위한 디자인은 필연적으로
표준화를 채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반면에, 반 데 벨데는 여전히 디자인을 개인적인 예술 활동의 범주
안에 두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논쟁은 결국 무테지우스 노선의 승리로 귀결되었는데, 이는 근대공업이 분업에 기초한 대량생산 방식이었음을 생각해보면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던 셈이다.
독일공작연맹의 존재와 활동은
유럽의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쳐 각국에서 연맹이 결성되었다. 예컨대
1910년에는 오스트리아 공작연맹이, 1913년에는 스위스 공작연맹이, 1917년에는 스웨덴 공작연맹이 각기 결성되었고, 1915년에는
영국의 디자인과 산업협회(Design & Industry Association)가 설립되었다. 이처럼
독일공작연맹은 20세기의 모던 디자인에서 독일이 선두국가로 나서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독일공작연맹은 윌리엄
모리스의 이상주의와 산업자본의 이윤추구, 그리고 국가의 제국주의적 팽창에 대한 관심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으로서, 독일공작연맹에서 보듯이 모던 디자인 운동은 비록 이념적으로는 윌리엄 모리스의 이상주의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의 현실화는 바로 산업자본주의의 발전과 보조를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이러한 모던 디자인 운동의 발전은 바우하우스에 이르러 일단 이념적으로나 양식적으로 완성을 보게 되지만, 또 그 이상과 현실 간의 모순 역시 결정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바우하우스의 이념과 실천
모던 디자인의 정점
바우하우스는 20세기 초 독일에서 14년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존속했던 한 미술학교의
이름이다. 그러나 바우하우스는 단지 미술학교의 하나로 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우하우스는 단순한 교육기관이라기에는 그 성격이 너무나 독특했고, 그것이 모던
디자인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의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는 무엇보다도 하나의 이념이며 운동이고
역사였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바우하우스를 하나의 미술학교의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모던 디자인 그 자체를
대변하고 상징하는 것으로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19세기
이후 성장해온, 그때까지 디자인에서의 모든 근대적인 노력의 최초의 완성태였으며 분기점이기도 했다. 그러면 과연 어떤 점이 이 작은 학교로 하여금 20세기 모던 디자인의
대명사로 여겨지게끔 하였을까.
먼저 바우하우스가 생겨나게
된 배경을 간단히 살펴보자. 바우하우스는 1919년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에 의해 독일의 바이마르에서 국립미술학교로 설립되었다. 1919년은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1년 뒤로서 독일 최초의 공화국인 바이마르공화국이 전쟁의 폐허 위에서 건국된 해이기도 하다. 바우하우스는 바로 이 바이마르공화국이 세워진 도시에서 전후 복구에 대한 기대와 함께 탄생되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의 탄생을 모던 디자인 운동의 흐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그 역사적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해준다.
그러니까 이미 19세기부터 근대 기계문명의 점증하는 힘은 그것의 조형적 표현인 모던 디자인의 맹아를 직접 간접적으로 키워내고
있었으며,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미술공예운동, 아르누보, 독일공작연맹 등은 모두 모던 디자인의 완성을 향한 도정에서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바우하우스는 바로 이러한 모던 디자인에로 향한 일련의 전개를 최종적으로 완성하고
확인하는 매듭이었는바, 이는 이미 20세기 초에 앞장 서기
시작한 독일 디자인의 전통(공작연맹)과 전후의 진보적인 정치적
분위기(사회민주주의)의 공존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다.
바우하우스의 이념
바우하우스의 설립자이자
초대교장이었던 발터 그로피우스는 당시 이미 실력을 인정받고 있던 건축가로서 독일공작연맹에서의 경험 등을 통해 모던 디자인의 이념과 방향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모던 디자인의 형성은 전통적인 아카데미 교육을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제까지 존재한 적이 없던 전혀 새로운 통합적인 학교를 설립할 꿈을 지니고 있었다. 그로피우스가 지녔던 모던 디자인 이념을 간단히 말하면, 예술의 기초는
기술이며, 또 그러한 기술의 바탕 위에서 모든 조형예술이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로피우스의 이념은 1919년 개교 당시 발표된 <바우하우스 선언>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면 이제 <바우하우스 선언>에 나타난 바우하우스의 설립 이념을 간단히 살펴보자. 그것은
크게 세 가지, 즉 조형예술의 통합과 장르간 신분차별의 철폐, 그리고
예술의 기술적 성격에 대한 확인이다.
먼저 조형예술의 통합과
장르 간 신분차별의 철폐라는 주장은 내용상 분리될 수 없는 의미를 지닌다. <바우하우스 선언>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모든 조형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건축에 있다.” 다시 말해서 건축을 중심으로 모든 조형예술이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조형예술들이 통합되어야 하며, 또 그 중심을 건축이 차지하여야
된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러한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서구 예술의 상황과 함께 역사적 전통을
참조하여야만 한다.
그로피우스는 무엇보다도
먼저 근대에 이르러 조형예술들이 장르별로 분산 고립화되어 진정한 문화적 힘을 상실하고 있으며, 또 그
장르들 간의 신분차별에 의한 불평등성이 심각한 문제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회화나 조각은 이른바 고급미술
또는 순수미술이라는 미명하에 사회적 현실로부터 벗어난 채, 한갓 유한층의 감상거리로 전락한 살롱미술에
지나지 않았고, 또 공예나 디자인 등은 응용미술 또는 장식미술이라는 딱지를 붙여 수준 낮은 천한 예술로서
따돌림을 받았던 것이다. 그로피우스가 보기에 이런 상황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조형예술은 원래 모두 위대한 종합예술인 건축으로부터 생겨난 한 형제들이며, 그것이 인간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고급과 저급 또는 순수와 비순수라는 식의 신분차별에 의해 재단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우하우스가 바로 윌리엄 모리스의 이념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이념은 바로 예술의
기술적 성격에 대한 강조로 이어진다. “건축가, 화가, 조각가들은 모두 공예로 돌아가야 한다”라는 선언문의 구절은 바로 그를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공예는 이미 분리된 장르의 하나로서의 공예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원래적 의미에서의 공작(工作), 즉
사람의 손과 기술에 의한 노동이라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공예에 대한 강조는 바로 예술의
기술적 성격을 재인식하고 강조한 것인 셈이다.
바우하우스의 교육
바우하우스의 이러한 이념들이
바로 그 교육방식에 적용되었음은 물론이다. 바우하우스 교육의 특징은 창조적인 기초과정의 운용 및 철저한
공방교육의 실시에 있었다. 기초과정은 이제까지의 모든 선입견을 배제하고 새로운 창조성을 얻기 위해서
요구된 것으로서, 과거 아카데미의 지배적인 기초교육 방식이었던 모방(소묘)으로부터 과감히 벗어난 것이었다(우리나라 미술대학의 기초교육은 바로
이러한 아카데미식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바우하우스의 기초과정에서는 어떤 사물의
묘사를 중심으로 하지 않고, 대신에 사물의 기본형태와 색채, 재료적
성질 등의 파악과 그러한 것들의 기하학적 구성에 중점을 두었다.
반년 내지 1년 정도의 기초과정을 마치면 공방과정에 들어가게 되는데, 학생들은
누구나 1개 이상의 공방에 소속되어 기술적, 예술적 숙련을
거쳐야만 했다. 바우하우스의 공방은 바로 중세의 공방을 모델로 한 것이었는데, 다만 특이한 점은 형태 장인과 기능 장인이 콤비가 되어 예술 표현적 측면과 함께 기술적 측면을 충분히 연마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공방과정은 3년으로 금속, 목공, 조각, 직조, 인쇄, 사진, 스테인드
글래스, 도자기, 벽화 등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바우하우스가 최종적인 목표로 삼았던 건축교육은 비교적 나중에 가서야 현실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의 경로는
결코 순탄치만은 못했다. 사회의 몰이해, 재정적 압박, 내부의 노선 갈등 등으로 그로피우스에 이어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한네스 마이어(Hannes Meyer)로 두 차례나 교장이 바뀌고, 바이마르에 이어 데사우, 베를린 등지로 근거지를 옮겨가며 전전하던
바우하우스는 새로이 권력을 장악한 나치에 의해 사회주의적 성향이 의심을 받아 결국 1933년에 폐교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24년간 약 500명가량의 졸업생을 배출한 역사상 그 유례가 보기 드문 혁신적 미술학교였던 바우하우스의 역정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후 바우하우스의 지도자들은 속속 해외로 망명하여 바우하우스에서의 실험과 이념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오늘날 바우하우스는 거의
신화화된 느낌이 없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바우하우스가 근대문명에 대해 던진 물음들, 즉 예술과 기술의 통합이라든가, 예술의 사회적 기능 회복과 같은
문제의식만은 뚜렷이 그 역사성 속에서 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러시아혁명기의 아방가르드 디자인
혁명과 아방가르드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혁명이었던
러시아의 1917년 10월혁명은 디자인의 역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그것은 러시아혁명이 20세기의 모던
디자인을 사회주의 이념과 만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구성주의(Constructivism)를 비롯한 혁명기의 일련의 디자인 운동을 우리는 아방가르드 디자인이라고 부른다. 아방가르드란 당대에 이념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가장 앞서 있는 전위라는 의미인데,
러시아 아방가르드 디자인은 미학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정치적인 면에서도 시대에 가장 앞섰던 운동임에 틀림없다.
이는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비슷한 시기의 서구 아방가르드와 구별지우는 특성이기도 한데, 20세기
초의 서구 아방가르드들은 (물론 정치적인 측면을 내재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미학적 측면을 보다 중시했다. 따라서 러시아혁명기의 아방가르드
디자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갖는 미학적 측면만이 아니라 정치적 의미까지도 정확히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당시 러시아에는 혁명 이전부터
서유럽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상당수의 아방가르드 예술가군이 형성되어 있었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전폭적으로
혁명을 환영하고 지지하였는데, 그들은 거의 정치적 혁명과 예술적 혁명을 동일시하였다. 이는 “1917년의 정치적 사건은
1914년에 이미 우리들의 예술에서 예견되었다”(타틀린)라든가 “입체파와 미래파는 예술에서의 혁명운동이며, 1917년의 정치경제
생활에서의 혁명을 선취하였다”(말레비치)라는 당시 예술가들의
주장에서도 잘 드러난다.
미래주의와 구성주의
혁명기의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은
여러 집단으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미래주의와 구성주의였다. 미래주의(Futurism)는 원래
1909년 이탈리아에서 등장한 것인데,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에 의해 전개될 새로운 미래를
강하게 희구하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러시아 미래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은 시인이자 화가인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Vladimir Mayakovsky)로서, 그는 <레닌의 깃발 아래>와 같은 시를 발표한 혁명기의 대표
시인이며 시와 그림을 결합한 선전용 포스터로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디자인과 관련해서는 역시 구성주의가 중요한데, 이는 조형적으로는 서구 입체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러한 조형이념을 단지 화면상에 형식적으로 적용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구체적인
현실에서의 생산과 연결시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20세기 현대미술과 디자인을 결합시킨 좋은 예를 보여준다. 구성주의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알렉산더 로드첸코(Alexander
Rodchenko), 블라디미르 타틀린(Vladimir Tatlin)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전통적인 미술가의 활동영역을 뛰어넘는 진정한 아방가르드의 면모를 보여준 사람들이다.
여러 집단으로 나뉘어져
있던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혁명정부가 1918년에 설립한 인민계몽위원회 시각예술분과에 소속되었다. 이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활동은 대체로 이 조직을 통해 이루어졌다. 당시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선전과 생산이었다. 선전과 생산, 바로 이 두 가지 문제는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직면한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는 바로
정치의 문제이자 예술의 문제이기도 하였는데, 바로 이점에서 그들이 서구의 아방가르드들과 구별된다는 점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다. 전통적으로 서구의 모더니즘은 예술의 문제를 순수한 미학적 문제로 국한시키는
경향이 있었고, 따라서 예술을 사회의 다른 영역과는 무관한 자율적이고 독립된 영역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모던 디자인은 예술과 기술 또는 미학과 산업이라는 문제를 함께 끌어안는 과정에서 발전해온 것이고, 그런 점에서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은 디자인적인 실천으로서의 성격을 보이는 것이다.
디자인과 문화혁명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선전과 생산으로서의 미술 활동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선전은 보다 정확하게는 선전선동, 즉 아지트프롭(Agit-Prop) 이라고 불렸는데, 혁명의 상황을 알리는 포스터의 제작, 각종 기념집회의 장식, 그리고 열차나 선박을 이용한 러시아 전역의 순회 활동까지 포함되었다. 이러한
활동에는 특히 마야코프스키와 로드첸코의 포스터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편 생산의 문제는 서구 선진국가들에
비해 생산력이 훨씬 뒤떨어지고, 또 농업 중심의 제정러시아로부터 사회주의혁명을 성취한 러시아로서는 절체절명의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러시아의 상황은 예술가들로 하여금 한가로이 이젤을 펴놓고 예술적 형식
실험만을 할 수는 없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가들이
그들의 영역으로부터 추방되어 생산 현장으로 내쫒겼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예술가들 자신이 적극적으로
예술과 생산의 결합을 시도하였고, 모든 예술 활동이 실제적인 생산 활동과 결합된 것이기를 원했다. 그리고 이는 그들의 미학적 이념 그 자체이기도 했다. 따라서 로드첸코는
노동자들의 작업복을 디자인하였고, 말레비치(Kasimir Malevitch)는
그의 절대주의(당시 추상미술의 한 경향) 이념을 적용한 찻주전자와
찻잔을, 여성작가 류보프 포포바(Luvov Popova)는
스포츠복을 디자인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구성주의 작가들의 활동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자면 디자인 활동에 속하나, 당시 그들의
이념은 보다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데에 있었다. 즉 그것은 사회주의 문화혁명의 과정이자 수단이었던 것이다. 구성주의 작가들의 디자인은 먼저 전통적인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거부와 단절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서 자연의 모방이나 현실의 장식, 그리고 현실과 동떨어진
특권적이고 고급한 것으로서의 예술 개념을 부르주아적 인 것으로 보고 바로 그러한 예술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예술은 더 이상 전통적인 미술관이나 전람회의 전시물 또는 실내의 장식품으로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생활 속에서 보여지고 사용되는 구체적인 것이어야 했다. 따라서
러시아 구성주의 디자인은 전통적인 고급예술을 부정하고 새로운 형태의 디자인에 의해 새로운 생활양식을 창조하고자 하였으며, 또 그것은 새롭게 건설될 사회주의 문화를 형성하는 것이 될 것으로 간주되었다.
아방가르드의 좌절
그러나 현대미술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전위적이고 진보적이었던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다음 몇 가지 이유에서 실패와 한계에 부딪쳤다. 첫째로
구성주의 작가들의 구상은 현실화되기가 어려웠다. 그 이유는 당시 러시아의 생산력이 매우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에, 구성주의자들이 계획했던 무수한 생활용품, 기념물, 건축물 등이 실제로 제작되지 못했다. 따라서 구성주의자들의 작업은
거의 대부분 스케치와 도면, 그리고 모형 제작에 머물고 말았다. 다음으로
그들의 형식주의적 경향을 지적할 수 있다. 구성주의 작가들이 혁명을 열렬히 환영하고 적극적으로 협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작업은 혁명 지도자들로부터 서구 추종의 형식주의라고 비판받았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러시아의 생산력과도 직접 관련되지만, 구성주의가
당시 러시아 인민들의 수준과 요구를 무시하고 앞질러 간 미학적 실험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의 위대한 실험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한편 보다 결정적으로는 레닌 사후 스탈린의 집권에
의해 구성주의는 공식적으로 소멸되고 말았다. 특히 1934년
소비에트작가동맹 제1차 회의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을 사회주의 러시아의 유일한 예술로 인정함에 따라, 구성주의를 포함한 모든
모더니즘적 경향은 배척받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에서는 문학과 미술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그리고 건축과 디자인에서는 시대착오적인 파시즘적 신고전주의가 부활하여 지배적인 양식으로 되었다.
그러나 혁명기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활동은 이후 현대미술과 디자인의 진행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고, 근래에 와서는 활발히 재조명되고 연구되고
있다. 1976년 파리 퐁피두센터에서의 <파리-모스크바 1900~1930>전을 계기로 각국에서의 전시가 활발해지고
있으며, 특히 최근 건축에서의 해체주의 경향은 러시아 구성주의를 재해석한 것으로서 주목받고 있다. 아무튼 러시아 아방가르드 디자인은 20세기의 가장 전위적이었던 예술
이념과 가장 진보적이었던 사회주의 이념이 결합된 귀중한 역사적 사례로서, 오늘날 자본주의의 상업적인
디자인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과는 전혀 다른 디자인의 가능성을 보여준 위대한 실험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모더니즘과 장식미술의 만남, 아르데코
모던 디자인의 반장식주의
우리는 디자인 역사에서 19세기를 장식미술의 시대라고 부른 바 있다. 그것은 19세기의 디자인이 아직 디자인의 독자적인 조형원리를 갖지 못한 채, 생산품의
외형에 장식을 가하는 부가적인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어떻게 보면 장식은 인간의
기본적인 조형의지의 하나로서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모던 디자인은 바로 그 장식을
이 세상에서 제거해버리고자 하였다. 과연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을까.
물론 모던 디자인의 그러한
반장식주의 역시 역사적 맥락 내에서 이해해야 할 일이다. 그것은 양식과 취미의 혼란기, 즉 전근대적인 귀족 취향과 근대적인 시민 취향의 충돌과 상호모방 속에서 절충적이고 애매모호했던 19세기의 상황과 단절하고 20세기의 새로운 양식을 창출하려는 모던
디자인의 비타협적인 의지가 낳은 결과였다. 따라서 모던 디자인은 모든 장식적 경향을 19세기 또는 그 이전의 잔재로 간주하고, 20세기의 새로운 양식은
매끈한 흰 벽처럼 순수하고 눈부시게 빛나는 것이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그러한 모던 디자인의
꿈은 실현가능한 것이었을까. 모던 디자인은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달리 보면 실패했다고 할 수도 있다.
20세기 초의 현대미술만큼이나 모던 디자인은 적어도 그것이 20세기의 절반에 가까운 시기 동안 동시대의 수많은 건축가와 디자이너의 작업규범이었으며, 또 실제로 수많은 작품이 생산되었다는 점에서 분명히 그것은 20세기의
성공한 양식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리는 바로 그 모던 디자인의 당당한 역사 바로 옆에
나란히 이어져 있는 장식미술의 흐름 역시 디자인의 역사에서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보다 엄격하게 말한다면, 모던 디자인은 결코 이 세상에서 장식을 완전히 추방하지 못했고, 또
그러한 꿈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어떠한 시대정신도 인간의 장식에의 의지를 앗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중의 취향
장식을 완전히 추방하고자
했던 모던 디자인의 꿈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이루어질 수 없었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 먼저 모던 디자인은 엘리트 디자이너들에 의해 주창되고 실천된 운동이자 양식이었다. 그러므로 모던 디자인의 엄격한 형식과 장식에의 배격은 대중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순수하고 고상한 것이었다. 대중의 취향은 언제나 절충적이고 타협적인 것이기 쉽다. 따라서 선구자들에
의해 개척된 모던 디자인 양식이 단지 양식상의 실험작이 아닌 이상, 대중에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일정
정도의 변용이 불가피했다.
대중은 장식적인 것을 좋아하고
원한다. 그러므로 모던 디자인 역시 타협하지 않고서는 현실 속에서 존속해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예컨대 대중은 아직도 피카소를 이해하지 못한다. 바우하우스나 러시아
구성주의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중은 도자기에 그려진 피카소풍의 장식화를, 그리고 몬드리안보다는 식탁보나 셔츠에 인쇄된 기하학적인 무늬를 통해서 현대미술을 사용할 뿐이다. 그리고 또 과연 모던 디자인 운동가들의 주장이 정당하고 그 반대는 그저 악(惡)일 뿐인가 하는 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과연 장식이 열등한
것이고 비본질적인 것으로 매도되어도 좋은 것일까.
언제나 최후의 선택은 대중의
취향이다. 서구 모더니즘 미술의 한 갈래를 차지하고 있는 모던 디자인은 그 전투적인 실험기를 거친 후, 장식미술과의 절묘한 결합을 통하여 대중화되었다. 아니 어쩌면 대중의
취향은 모더니즘조차도 자신들의 감각에 맞게 변용하여 받아들였다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모던 디자인과 장식의 만남
우리는 19세기의 아르누보 양식을 마지막으로 일단 유구한 장식미술의 역사는 끝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장식미술의 역사는 20세기에
들어서도 끝나지 않았으며, 또 그럴 수도 없었다. 그것은
아르데코(Art Déco)의 존재가 잘 증명하고 있다. 아르데코의
성격은 매우 흥미롭다. 즉 그것은 모더니즘 양식이면서도 장식미술의 일종이다. 장식을 철저히 배격하는 모더니즘(모던 디자인)과 장식미술이 만난다면 그야말로 흥미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것임을 아르데코는 명확히 보여주었다.
아르데코는 1930-40년대 프랑스에서 나타난 양식이다. 프랑스는 유럽에서는
가장 풍부한 장식미술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만큼 장식미술이 오랫동안 디자인 경향을 지배해온 나라이다. 그런
면에서 프랑스는 20세기 초 모던 디자인의 출발에서는 영국이나 독일,
오스트리아 같은 나라들에 비해 한 발 뒤처지게 되었지만, 대신에 모더니즘과 장식미술을 결합한
아르데코 양식을 낳았다. 바로크, 로코코를 거쳐 각기 19세기에는 아르누보를, 그리고
20세기에는 아르데코를 낳은 프랑스는 그만큼 장식미술의 전통이 강한 나라였다.
그러면 모던 디자인과 장식미술은
어떻게 결합이 가능했으며, 그 결과 아르데코 양식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은 간단히 말하면 아르데코가 모더니즘의 조형적 요소들 자체를 하나의 장식적 모티브로써 끌어들여 활용하였다는
데 있다. 즉 입체파나 미래파, 데스틸 등이 개척한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조형 요소들이 바로 아르데코에게는 상징적이고 감각적인 장식적 모티브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이다. 원래
현대미술과 디자인에서의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조형 요소들은 장식적인 목적을 위해 탐구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더니즘 미술이 추구한 미학적 이념의 순수형식이었다. 그러나 아르데코는 그러한 요소들 역시 필요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장식적인 목적에 사용될 수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또 하나 아르데코의 특징으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그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감각이다. 이는
바로 아르데코의 선배격인 19세기의 아르누보와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다. 아르누보 역시 산업화가 진행된 서구 근대의 장식 양식이다. 그러나
아르누보에게는 여전히 자연에 대한 향수가 있으며 산업과 자연을 화해시켜보려는 마지막 안간힘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아르데코는 전혀 다르다. 아르데코에서 자연에 대한 향수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아르데코는 근본적으로 도시적인 예술인 것이다.
현대미술에서의 기하학적 추상, 속도감 등의 요소는 아르데코의 도시적인 특성을 살리는 데
아주 적합한 요소들이었다. 아무튼 전반적으로 아르데코는 양차대전 사이 프랑스의 산업화와 도시화에 걸맞는
화려하고 쾌락적인 양식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아르데코 양식을 가장 재빠르고 활기차게 수입하여 발전시킨
곳이 미국이라는 사실 역시 우연은 아닌 셈이다.
아르데코의 주무대
독자적인 장식미술의 전통이
없었던 미국은 1930년대 프랑스의 아르데코에서 자신들이 모방해야 할 적합한 대상을 발견하게 된다. 1차대전 이후 세계 최고 부국으로 성장한 미국의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고 대변해줄 예술 양식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도시적이고 현대적이면서도 화려한 아르데코 양식은 재빨리
미국에 수입되어 변용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비교적 소규모 일상용품들에 적용되었던 아르데코는 미국으로
건너와 대형화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의 아르데코는 무엇보다도 대도시의 마천루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30-40년대 뉴욕의
명물이 된 크라이슬러 빌딩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미국 아르데코의 기념비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미국에 건너온 아르데코는 미국 산업자본가들의 과시욕을 만족시켜주는 거대한 기념비로 전이되었다. 미국에서
아르데코의 또 다른 주요한 이식지의 하나는 할리우드였다. 이미
1920년대부터 떠오르기 시작한 할리우드의 영화산업은 어느덧 미국의 주요 산업의 하나가 되었고, 미국은
물론 점차 전세계인들의 꿈과 생활양식을 주조해내는 원천이 되었다. 바로 이 꿈과 환상의 공장인 할리우드
역시 아르데코를 필요로 했다. 실제로 과장되고 현혹적으로 꾸며진 영화관 건물 등은 할리우드 양식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실로 <벤허>나 <십계> 같은
할리우드의 대작 사극과 짝을 이루는 조형적 구축물이었다.
1930-40년대에 손쉽게 미국인들의 꿈을 만족시켜주었던 미국판 아르데코 양식은
이후 이른바 유선형(Streamline) 양식으로 발전하면서, 초기의
미국 산업디자인에 주된 양식적 기초를 제공해주었다. 거기에는 여전히 미래파적인 속도감이라든지 도시적인
감각들이 주로 표피적인 맥락에서 유지되었다.
아무튼 아르데코가 디자인사에서
남긴 교훈을 몇 가지 생각해볼 수 있겠다. 전위적인 모던 디자인 선구자들의 순수한 이념은 결코 그대로
유지될 수 없으며, 그 역시 하나의 미학적 허구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장식에의 욕구는 결코 특정한 미학적 신념에 의해 부정될 수 없는 것이며, 그 역시 역사적 조건에
따라 변용되어가는 조형적 형식이라는 점 등일 것이다. 이는 특히 2차대전
이후 아르데코의 복고적 부활이라든가 최근 포스트모던 디자인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 경향과의 유사성 등을 통해서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미국 산업디자인의 발달
미국의 기능주의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에 출품된 미국 제품 중에서 가장 주목을 끈 것은
맥코믹의 버지니아 수확기와 새무얼 콜트의 연발권총이었다. 그것들은 당시 유럽인의 눈에는 그들이 출품한
세련되고 우아하게 장식된 제품들에 비해, 너무나 단순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그러나 그 제품들의 단순한 제작과정과 뛰어난 성능은 유럽인들을 놀라게 했는데,
그것은 모두 조립생산방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는 이미 19세기 중엽 미국 제품의 디자인이 장식적 편견 없이 기능주의를 추구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예가 된다.
미국은 유럽과 같은 유구한
장식미술의 전통이 존재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유럽에서 이주해온 퀘이커교도들에 의해 만들어진 꾸밈없고
기능적이며 소박한 가구의 전통이 있는 정도였다. 독립 이후 오랫동안 미국은 유럽문화에 대한 동경과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런던 만국박람회의 미국 출품물에서 볼 수 있듯이, 어느덧 미국은 자신의 독자적인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장식미술의 전통이 부재한 가운데, 근대산업의 발달은 미국식 기능주의를 자연스럽게 형성해냈던 것이다. 사실 미국은 모던 디자인이 발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진 나라였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장식미술의 전통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디자인에 대한 역사적 인습이나 편견 없이 새로운 양식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음을 말해준다. 물론 유럽의 화려한 장식미술에 대한 미국인의 동경과 결핍의식은 1930-40년대에 이르러 아르데코 양식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과 과잉모방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국 디자인이 발달할 수 있었던 무엇보다도 중요한 조건은 바로 근대산업의 비약적인 성장에 있었다. 19세기 중엽 남북전쟁을 치르고 근대자본주의 산업 체제의 조건을 공고히 한 이후 미국의 산업은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점차 유럽을 능가해갔다. 유럽이 전통적인 장식미술을 고집할 것인가, 아니면 근대적인 기능주의를 선택할 것인가를 놓고 끊임없이 고민하는 동안, 미국은
아무런 선입견 없이 근대 기능주의의 길로 나아갔던 것이다.
미국의 디자인은 유럽에서와 같이 선구적인 사상가나 의식적인 운동에 의해 추동된 것은 아니었지만, 근대
기계생산품의 미적 성격을 간파하고 미국 디자인의 앞날은 제시해준 사상가들이 없지는 않았다. 기계미학과
기능주의의 원리를 발견하고 독자적인 주장을 편 인물로는 조각가 호레이쇼 그리노(Horatio Greenough)와
시인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 있었다.
특히 호레이쇼 그리노는 미국 예술이 유럽식 고전주의의 모방으로부터 벗어나 기능의 원리에 충실한 조형을 추구할 때, 바로 그 독자성을 확보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미국 기능주의
이론의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이후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과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미국 기능주의 이론의 전통을 이어나갔다.
산업 디자이너의 탄생
19세기 동안 이루어진 근대산업의 발달이 기능주의를 낳았다면, 20세기의 대량생산체제는 오늘날 미국 디자인의 모습을 형성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저 유명한 포드 시스템에 의해 가능해진 대량생산체제는 대량화의 신화를 낳으며 미국인들의 생활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20세기 미국의 산업디자인, 아니 오늘날 디자인의 현실은 바로 이
대량생산체제가 없었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 사회의 대중소비사회로의 발전은 미국 디자인의
성격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즉 그것은 디자인의 전문화와 상업화를 가져왔다.
먼저 디자인의 전문화는
디자이너라는 전문직업의 탄생과 기업체 내에 디자인 담당부서가 생겨났음을 말한다. 물론 이미 1907년 독일의 페터 베렌스가 AEG사의 책임 디자이너로 고용되어
활동한 선구적인 사례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에 가장 가깝게 디자이너가 전문직업으로
일반화된 것은 바로 1920년대 후반 미국에서이다. 전문직
디자이너는 이른바 컨설턴트 디자이너로 불리는 디자인회사를 운영하는 디자이너와 기업체에 고용된 디자이너, 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컨설턴트 디자이너가 먼저 출현하였다.
알려져 있는 최초의 컨설턴트
디자이너는 노먼 벨 게데스(Norman Bell Geddes)로, 그는 1927년 자신의 디자인회사를 설립하여 제조업자들의 주문을 받아 디자인을 해주었다. 그 이후로도 월터 도윈 티그, 헨리 드레이퍼스, 레이먼드 로위, 해럴드 반 도렌 등이 전문적인 직업 디자이너로 등장하여
명성을 날린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한편 자동차회사인 제너럴 모터즈가
1928년 회사 내에 디자인 담당부서를 설치하고 자동차의 스타일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 기업 내 전문 디자이너직의 본격적인 사례가
된다.
한편 이러한 디자이너 전문직의
탄생은 바로 미국 디자인이 자본주의적 시장체제 속에서 디자인을 유력한 경쟁수단으로 파악하고 활용하였다는 사실과 직접 관련된다. 대체로 19세기와 20세기
초의 기간 동안 유럽 디자인의 발전이 몇몇 선구적인 디자이너들에 의해 예술운동적 차원에서 전개되어나간 데 반해,
미국 디자인은 그 성장기로부터 철저히 상업적인 동기에 의해 발달되어갔다는 점에서 유럽의 경우와 다르다.
사실 현대 미국 디자인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디자인의 직접적인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디자인의 이러한 성격은 특히 1929년 경제공황 이후 더욱 두드러져, 디자인은 소비자의 구매욕구를 자극하여 판매를 촉진시킴으로써, 시장의
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마케팅 전략의 일환으로 정착되어갔다. 물론 이러한 디자인의 상업화는 윤리적 측면에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 미국과 같은 대량소비사회에서의 디자인이 모던 디자인 선구자들이 추구했던
것과 같은 존재방식을 가질 수 없음은 분명한 것이었다.
유럽의 영향
이미 미국 디자인은 1930년대에 그 고유한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유럽으로부터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사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유럽 문화의 영향은
지속적이었는데,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1930년대 중후반
동안 미국에 이주해온 바우하우스인들이 끼친 영향이었다. 바우하우스가
1933년 나치에 의해 폐교 당한 후 다수의 바우하우스인들은 해외 망명의 길을 택했다. 그중에서도
바우하우스의 설립자인 발터 그로피우스를 비롯한, 미스 반 데어 로에,
모홀리 나기, 헤르베르트 바이어 등의 인물이 미국에 정착하여 미국의 디자인 교육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모홀리 나기가 시카고에 세운 디자인연구소는 뉴 바우하우스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큼
바우하우스의 맥을 잇는 역할을 하였다. 이들 바우하우스인들은 미국에서 대환영을 받았고, 어떤 면에서 그들의 기능주의 이념은 미국이라는 거대 산업사회에서야 비로소 실현 가능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주목할 만한 유럽
예술의 영향은 1930년대 수용된 아르데코의 미국적 발전이었다. 1차대전
이후 경제적으로 번영을 이룬 미국인들에게 현대적이면서도 화려한 아르데코 양식은 아주 매력적인 것이었다. 미국에
수입된 아르데코 양식은 한걸음 나아가 1930년대에서 거의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유행한 유선형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유선형이란 원래 유체역학에서 나온 개념으로서, 비행기나 선박의 동체에서 볼 수 있듯이 공기나 물결의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한 형태를 가리킨다. 그러나 미국 디자인에서의 유선형은 하나의 형태적인 문법으로서, 그것의
기능적 원천과는 상관없이 모든 제품들에 적용되었다. 그런 면에서 유선형은 아마도 본격적인 최초의 산업디자인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미국인의 꿈(American
Dream)의 시각화 그 자체이기도 한 것이다.
근대산업의 눈부신 발달, 그리고 대중소비사회의 시대를 열어간 미국의 디자인은 전문화, 상업화된
디자인의 전형으로서, 유럽인들이 생각한 모던 디자인의 이상과는 매우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것은 분명 모던 디자인 이념의 타락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미국의 산업디자인이 현대 산업사회에서의 디자인의 현실적 존재방식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준 것만은 분명하다.
모더니즘의 산업화와 대중화
모더니즘의 쇠퇴
20세기 초부터 진행된 모던 디자인 운동은 대체로 1930년대를 기점으로 그 전위적이고 진보적인 실험기를 마감하게 된다. 모던
디자인 운동이 쇠퇴기를 맞이하게 된 계기는 각기 정치적, 사회적 측면에서 나타났다. 정치적 이유로는 유럽에서의 전체주의 체제의 대두이고, 사회적 이유로는
대중소비사회의 출현을 지적할 수 있다. 먼저 전체주의 체제는 모던 디자인 운동의 급진성을 매우 위험한
것으로 보고 이를 탄압하였다. 1920-30년대 동안 유럽에는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필두로 해서 독일의
나치즘, 그리고 러시아의 스탈리니즘이라는 전체주의 체제가 등장하였다.
이탈리아를 제외하고 이들
전체주의 국가들에서 모더니즘 예술 경향은 정면으로 부정되었는데, 이 점에서는 그 국가들의 이념이 좌파든
우파든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나치 독일은 모더니즘을 퇴폐적인 예술, 그리고
사회주의적 냄새가 나는 것이라고 해서 금지시켰으며, 러시아에서는 모더니즘을 부르주아 형식주의라고 해서
매도했던 것이다. 그에 따라 독일에서는 바우하우스가 폐교 당했고 러시아에서는 구성주의가 숙청되었다. 곧 이어 세계는 2차 세계대전의 전화에 휩싸이게 되고, 모더니즘의 실험정신 역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그러나 전체주의 국가에서의 공식적인 금압과는 달리, 다른 나라들에서
모더니즘은 점차 산업화와 대중화의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다. 이들 나라에서의 모더니즘은 20세기 초부터 1930년대까지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모던 디자인 운동의
성과들을 현대 대중소비사회의 요구에 맞게 수용해간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양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모던 디자인 운동이 이루어낸 조형성을 산업이라는 과정을 통해
대중화해 간 것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모던 디자인 운동이 본래 지향했던 문제의식을 희석시키고
소비대중의 취향이라는 미명하에 상업화해 간 과정이기도 했다.
모던 디자인의 대중화
출발 당시 모던 디자인의
이념은 근대 산업사회의 새로운 조건들 속에서 과거의 전통적인 양식과 단절하고 산업사회에 적합한 양식과 디자인의 합리적인 존재방식을 추구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20세기의 대중소비사회는 모던 디자인의 진로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사회적 조건이었는데, 무엇보다도 초기 모던 디자인의 엄격하고 금욕적인 경향은 대중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데, 왜냐하면
대중소비사회에서 대중은 끊임없는 욕구의 자극과 소비에의 충동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오늘날 산업사회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순환으로 특징지어지며, 그 메카니즘을 유지하고 가속화시키는 역할을 디자인에게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초기 모던 디자인의 비타협적인 정신과 형태는 이러한 산업사회의 현실에 맞게 철저히 변용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러한 산업화 과정을 통해 모던 디자인은 보다 널리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본래의 비판적 문제의식을 내버린 상업화의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모던 디자인의 대중화 경향은
일찍이 1920-30년대 아르데코의 유행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아르데코는
기본적으로 모더니즘 양식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나, 그것의 문법은 다분히 장식적인 것이었고, 따라서 모더니즘과 장식미술의 결합 가능성을 보여준 양식이었다. 그런
점에서 아르데코는 최초의 대중화된 근대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보다 본격적으로 대중적 성격을
드러낸 디자인은 미국에서 등장하였다. 1930년대의 미국 디자인은 가장 먼저 대중소비사회의 단계로 들어선
미국 사회의 요구에 발 빠르게 적응해갔는데, 미래파와 아르데코의 영향을 받은 유선형 양식은 바로 당시
미국 디자인의 대표적인 조형 언어였던 것이다.
‘굿디자인’운동의 목표
디자인의 대중화는 바로
상업화와 직결된 것이었고, 이는 윤리적 목적의식을 중시해온 모던 디자인의 이념과는 전혀 다른 현실이었다. 한편으로는 디자인의 대중화와 상업화라는 시대적 조건에 직면하여 원래 모던 디자인의 이상을 그러한 현실과 조화시켜보려는
노력도 나타났다. 그러한 노력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굿
디자인(Good Design)’ 운동이다. 이 운동은 원래 1940년대 미국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이 전시회를 중심으로 펼친 계몽적인 활동에서 유래하지만, 오늘날에는
계몽적 성격을 띤 디자인 진흥사업의 대명사가 되어 있다. 이미 국가적 또는 공공적 차원에서의 디자인
진흥사업의 역사는 일찍이 19세기 유럽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지만, 당시
미국은 유럽의 앞선 디자인 경향을 국내에 소개하기 위해 이러한 사업을 추진했던 것이다.
오늘날 굿 디자인 운동은
비단 미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파급되어 유사한 제도들이 운용되고 있는데, 굿 디자인 제품 선정, 굿 디자인 마크 부여, 전시회 등을 통해 우수한 디자인의 제품 생산을
장려하는 것을 공통된 목표로 삼고 있다. 그리고
굿 디자인 제품의 선정 기준으로는 역시 국가별로 약간씩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대체로 기능성, 경제성, 심미성, 사회성 등의 요소들을 항목화하여 부과하고 있다. 이처럼 굿 디자인 운동의 목표는 대중에게 모던 디자인의 성격을 올바르게 이해시키고, 또 산업화 과정에서 상실되기 쉬운 디자인의 질과 사회적 책임감을 각성시키고자 하는 것인데, 거기에는 근본적으로 서구 중산층의 합리주의적인 생활양식과 현대 소비사회에서의 소비지향적인 생활양식 간의 충돌을
완화시켜보고자 하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던 디자인과 국제주의
한편 모던 디자인의 영향은
점차 세계의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어, 일부 국가에서는 자국의 고유한 전통과 모던 디자인 양식을 접목시켜
독자적인 발전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원래 모던 디자인은 국제양식(International
Style)으로 불릴 만큼 국제적이고 보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국제양식 역시
문화적 전통이 강한 국가들에 전파, 수용되는 과정에서 그 민족의 고유한 감성과 결합되면서 민족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이러한 모더니즘을 우리는 민족적 모더니즘(National Modernism)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특히 이러한 민족적 모더니즘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시장에서의 무역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해당 국가
제품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몫을 해내고 있다. 때문에 오늘날에는 모든 국가들이 자기
고유의 디자인 창조를 매우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는 실정이다. 대체로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민족적 모더니즘 양식을 산출해낸 국가들로는 독일, 이탈리아, 스칸디나비아제국, 일본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그들의 문화적 전통을 가장 현대적인 모더니즘 양식 속에 결합시켜내는 데 성공한 나라들이다.
독일은 20세기 모던 디자인 운동을 주도한 국가로서, 모더니즘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에도 앞에서 말했다시피 나치 시기 동안에는 모더니즘이 억압되었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다시 그 전통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디자인은 신기능주의(Neo-Funtionalism)라고 불리는데, 여기에는 바우하우스의 계승자라고 할 울름조형대학의 공헌이 매우 크다. 울름조형대학(Hochschule für Gestaltung, 1955-68)은 서독의 울름에 설립된 디자인학교로서, 바우하우스의 명성을 이어받아 전후 디자인 교육과 이론을 주도했다. 특히
울름조형대학은 가전제품회사인 브라운사와 긴밀한 산학협동체제를 구축하여 선구적인 사례를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20세기 초부터 1930년대까지
주로 운동적 차원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던 모던 디자인은 이후 산업화와 대중화 과정을 거쳐 대체로 1950-60년대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이미 디자인의 주도권은 과거와 같이 소수 엘리트 디자이너가 아니라, 산업과 대중의 취향이라고 하는 변덕스러운 현대 산업사회의 구조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이 변덕스러운 주체들은 이내 모더니즘 양식에 지루함을 드러내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몸짓을 보이게 된다.
포스트모던 디자인의 양상
모더니즘 이후의 디자인
포스트모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은 20세기 후반의 특정한 사회문화적 상황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
말에서 접두어로 쓰인 포스트(Post)는 탈(脫) 또는 ‘이후’라는 의미인데, 따라서
포스트모던이란 모던, 즉 서구의 근대 이후 또는 그로부터 벗어난 어떤 상태라는 뜻이 된다. 이렇게 볼 때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는 어떤 상태를 적극적으로 규정하고 있다기보다는 이전의 모던한 상태로부터
벗어난, 그리고 그에 대해 반대, 부정, 극복하려는 모든 태도와 경향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디자인에서의
포스트모던 역시 마찬가지인데, 포스트모던 디자인은 대체로 이전의 모던 디자인, 즉 기능주의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20세기 후반의 다양한 경향들을
통칭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디자인을 등장시킨
조건은 바로 현대의 대중소비사회이다. 20세기 중반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대중소비사회는 거대한 소비자
집단으로서의 대중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사회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적 조건은 전통적인 기능주의
디자인의 엄격하고 엘리트적인 형식에 대한 반발을 낳았고, 여러 면에서 기능주의 디자인으로부터 벗어나거나
또는 극복하려는 움직임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20세기 초중반을
지배했던 모던 디자인의 퇴조는 마치 1세기 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일종의 양식적 무정부 상태를 빚어내었는
바,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모더니즘 이후의 디자인은 이전의 모더니즘과 현재의 상태에 대한 관점에 따라
매우 다종다기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테면 엄격한 전통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이 곧장 대중 취향의 쾌락주의로 나아가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모더니즘을 서구 디자인사의 맥락에
집어넣고 양식의 문법적 해석을 시도하는 역사주의적 경향, 대중소비사회라는 미명하에 상업주의의 도구가
된 디자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대안적 방식을 모색하는 입장 등이 제각기 분출되어 나왔다. 이러한
경향들은 물론 일정하게 서로 연결되면서 전체적으로 포스트모던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포스트모던
디자인의 양상은 결코 단일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열거한 대중 취향적, 역사주의적, 대안추구적인 세 가지 경향을 통해 포스트모던 디자인의
전체상을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대중 취향적 경향
먼저 대중 취향적 경향은 포스트모던 디자인 전반에 걸쳐 상당히 공통되게 나타나는 성격인데, 그
출발은 1960년대의 팝 디자인(Pop Design)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팝 디자인은 영국에서 먼저 나타났지만, 그것은
대체로 2차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전세계에 퍼져나간 새로운 문화 형태인 대중문화(팝 뮤직, 영화, 팝 아트
등)의 직접적인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미 2차대전을 거치는 동안 미국 대중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영국에서는 1950년대
중반에 일군의 화가, 건축가, 비평가들이 결성한 '인디펜던트 그룹'에 의해 현대의 대중문화를 분석하고 연구한 활동이
있었다. 여기에 참여했던 리처드 해밀턴(Richard
Hamilton)이나 에두아르도 파올로치(Edouardo Paolozzi) 같은 작가들에
의해 이른바 팝 아트의 초기 형태가 등장하였으며, 이는 나중에 미국에서 현대미술의 한 조류를 형성하게
된다. 팝 디자인은 전통적인 기능주의의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기준을 대신하여, 현대를 사는 대중의 취향을 반영하는 일시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를 적극 도입함으로써, 결정적으로 모던 디자인으로부터 이탈하는 몸짓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역사주의적 경향
한편 팝 디자인의 등장으로
모던 디자인이라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지배적인 양식이 붕괴되자, 잇달아 과거의 모든 양식들이 되살아나는
광범위한 복고유행이 다시 대두되었다. 이는 19세기의 역사주의
이후 거의 한 세기만에 다시 나타난 신역사주의(Neo-historicism)로서, 현대사회에서 대중의 취향 변화에 따라 빅토리안, 아르누보, 아르데코 등 과거 100년간의 모든 양식들이 차례로 부활하였다 사라지는
현상을 보였다. 산업사회의 대량생산품으로 포화된 생활환경에 대한 싫증과 반성에 따라 전통적인 수공예에
대한 새삼스런 관심 역시 영국을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공예 부활(Craft Revival) 현상은
정확하게 19세기 미술공예운동의 20세기 판본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러한 전반적인 복고유행은 단순한 과거에의 회고적 관심에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오늘날 대중의 취향 변화에 따른 유행 상(像)으로서
역사적 양식의 재활용 성격을 띠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미국의 포스트모던
건축에서는 대중 취향적 관심과 역사주의적 경향이 한데 결합되어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오늘날 과거의
역사적 양식을 차용하고 패러디하면서 하나의 절충적 양식처럼 인식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은 1970년대
미국의 건축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이러한 포스트모던 고전주의는 로버트 벤추리(Robert Venturi)나 찰스 젱크스(Charles Jenks) 같은
건축가들에 의해 주창되었는데, 그들은 기능성이라든지 윤리성과 같은 근대건축의 단일한 지배논리를 부정하고
역사적 전통, 대중적 어법 등을 건축의 조형문법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장본인이다.
특히 로버트 벤추리는 기능주의
건축의 대가인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명구인 ‘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Less
is More)’를 뒤집은 ‘적은 것은 지루하다(Less
is Bore)’라는 말로 포스트모던 건축의 논리를 단적으로 표현했다. 이를테면 양식적인
절제나 엄격함보다는 역사적인 것이건 대중적인 것이건 보다 많은 언어와 의미를 건축의 형태에 부여할수록 말 그대로 건축이 풍부해진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포스트모던 건축의 논리에는 나름대로 근대건축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과 함께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안적 디자인
이제까지의 대중주의나 역사주의와는
달리 제3의 대안추구적 경향은 일반적으로 반디자인(Anti-Design)이라고
불리운다. 반디자인은 단순히 디자인의 양식이나 논리 자체에서가 아니라 넓게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변질된
모던 디자인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고 극복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반디자인은 모던 디자인이
초기에 보여주었던 아방가르드적 전통을 계승하려는 입장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반디자인 운동은
다시 ‘대안적 디자인(Alternative Design)’과 ‘급진적 디자인(Radical Design)’으로 구분된다.
먼저 대안적 디자인은 1960년대 서구에서 거세게 일어났던 광범위한 저항운동(신좌파운동, 청년문화, 반전평화운동 등)을
사상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대안적 디자인은 우선적으로 자본주의의 이윤추구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디자인을 비판하고, 그로부터 벗어난 대중의 자생적인 생활양식을 지지할 수 있는 디자인을 추구하였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전지구적인 문제로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환경 파괴와 같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생태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생산과 디자인을 모색한 운동이었다.
대안적 디자인의 입장은 1971년 빅터 파파넥(Victor Papanek)이 쓴 <실제 세계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the Real
World)>이라는 책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 책에서 파파넥은 디자이너들이
기업의 이윤 추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장애인과 제3세계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디자인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파파넥은 디자인계의 슈바이처라고까지 불리게 되었고, 그의
양심적인 호소가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감명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 디자인의 현실이
그런 자선사업적인 처방만으로는 근본적으로 변화될 수 없는 것이어서 본질을 직시하지 못한 소박한 주장이라는 비판도 없지 않다. 오히려 파파넥의 선구적인 주장은 오늘날 유행하는 그린 디자인(Green Design: 환경보호
디자인)에서 역설적으로 계승되고 있다고 보여지는데, 여기에는
파파넥의 비판적인 문제의식이 교묘하게 기업의 자기 이미지 관리의 차원으로 전이되어 있는 측면도 부정할 수 없다.
다음으로 급진적 디자인은 1970년대 후반 이후 이탈리아의 에토레 소트사스, 안드레아 브란치, 알레산드로 멘디니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알키미아, 멤피스 등의
그룹에 의해 추진된 반모더니즘(Anti-modernism) 운동을 가리킨다. 이들 역시 오늘날 상업적 디자인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나, 이들의 주된
관심은 모던 디자인의 획일성과 미학적 빈곤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모더니즘의 좋은 취미(Good Taste)에 대항하여 저속함(Kitsch)과 나쁜 취미(Bad Taste)를, 그리고 기념비적 상징성(Monumetality)에 대항하여 평범함(Banality)에 주목하였고, 해학적이고 유희적 성격이 강한 작품들을 실험함으로써 포스트모던 아방가르드의 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 포스트모던 디자인의
양상을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는데, 포스트모던 디자인 역시 발생 초기에는 일정하게 모던 디자인과
현대문명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닌 아방가르드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고도소비사회와 다국적 자본주의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 대중들에게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하나의 새로운 양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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